(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 김 광철 목사
- 3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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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편 139:17,18).
다윗은 17절에 고백하기를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자신을 지으심으로 자신의 삶에 개입하셨고 그 이후로도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자신의 삶 가운데 계속적으로 개입하셨고 자신의 삶에 대해 이미 다 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대하셨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그러한 세심한 배려와 생각이 너무나 보배롭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대한 생각해 주시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너무 보배롭고 자신 향한 수 많은 생각들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17, 18절 상)
그런데 18절 하반절에 갑자기. “내가 깰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구절을 영어 성경 NET Bible은 이렇게 의역했습니다. “내가 나를 향한 수 많은 주님의 생각들을 세는 것을 그친다고 할지라도 나는 당신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Even if I finished counting them, I would still have to contend with you.). 주님께서 나를 향한 생각 마음들을 이미 알았으니 얼마나 나를 더 생각하는가를 계속적으로 세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가 되심을 만족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를 때 그 마음을 알기 위해 이러게 말도 해보고 저렇게 말도 해본다. 좋게도 말해보고 나쁘게도 말해봅니다. 연인들이 조그만 일에도 마음이 상하고 티각 태각 하는 것도 다 이때문이 아닙니까? 상대의 마음을 아직 다 모르기 때문이고 그러한 과정은 상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요 그러한 티각 태각 하는 행동은 ‘나는 나에 대한 당신의 진심을 알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진심을 다 알았다면 그러한 확인과정은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기를 나의 어머니도 나를 임신한 것 조차 모를 때에 이미 나를 알고 계셨습니다(15,16절). 나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생각들은 너무나 많아서 모래를 셀 수 없듯이 셀 수가 없습니다(18절).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미 눈치 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신약식으로 말하자만 나를 그리스도의 피값을 지불하고 살만큼 나를 귀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고 하나님께 실망하는 그러한 일이 없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 성숙한 하나님의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에 나타난 “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영혼 깊숙이 알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머리 속 지식에 그치지 않고 나의 영혼이 인식하게 되기를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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