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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예배의 중요성)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마가복음 11:13)

 

예수님께서 배가 고파서 무화과 나무 가까이에 갔는데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고 그 나무를 저주하시니 그 나무가 말라 죽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때가 되지 않은 애꿎은 나무를 저주해서 죽게 만들었습니까? 무화과 나무는 열매가 먼저 맺히고 다음 잎사귀가 달립니다. 그러므로 잎사귀가 있다면 당연히 열매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나무에 가까이 가보니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열매가 있는 것처럼 잎사귀만 무성했던 것입니다. 마치 열매가 있는 것처럼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하반절에 보면  무화과 열매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이는 “때가 아직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본격적인 수확철은 아직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처음 열매가 맺히는 시기였고 그 설익은 첫 열매는 그래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있는 것처럼 잎사귀가 무성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의 초점은 “열매 없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가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고 있는 무화과 나무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즉 무화과 나무는 열매가 먼저 나고 잎사귀가 후에 나는데 나무 잎이 있음으로 열매가 있는 것 같이 가장한 것입니다. 거짓으로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21절에 그 저주대로 무화가 나무는 말라 죽었습니다. 즉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에 대한 질책이요 심판이었습니다.

 

이 무화과 나무 이야기는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먼저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이 나오고, 그 중간에 타락한 성전을 정화시키는 사건이 나오며, 그 다음 21절에 무화과 나무 저주의 결과가 나옵니다. 앞 뒤는 무화과 나무 사건을 말하고 있고 그 중간은 예수님의 성전 정결 사건이 나오게 함으로 성전 정결사건은 무화과 저주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기도하는 장소인 성전은 이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이 가식과 거짓이 난무한 곳으로 변해버렸고 무화과 나무가 심판 받은 것 같이 가식과 거짓으로 인해 기능을 상실한 성전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삶이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부패하면 그것은 지도자들의 부패 때문이고, 지도자들이 부패하면 백성들이 부패하게 되어있고 백성들이 부패하면 온 나라가 부패하게 되어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도 예배가 중심이 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소홀해지거나 타락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게 되고 우리의 삶도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가 살아나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삶도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적 예배든지 개인 예배든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살아있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예배를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아무런 감격이 없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며 예배가 형식적이 되어가면 신앙이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배가 살아있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살아나게 되어있고 그 사람의 삶도 더불어 살아나게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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