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사도행전 20:12)
바울과 그 일행은 빌립보를 거쳐 드로아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일주일을 머물며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칩니다 (6,7절). 예배는 떡을 떼는 교제와 함께 말씀강론으로 이어졌는데 이 말씀강론은 아주 긴 시간 계속되었습니다. 첫번째 설교는 해질 때부터 한밤중까지 계속되었고 (7절), 두번째는 한밤중부터 날이 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11절).
본문은 강론(7,9절)을 바울이 성도들에게 했다고 말씀하는데 이 단어의 헬라어는 질문과 대답 형태로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마도 성경공부 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야기”를 했다고 말하는데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 “장시간에 걸친 진지한 이야기”(JBP) 혹은 “많은 대화”로(NET)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강론와 이야기는 질문과 답이 포함된 토론 식 성경공부이며 또한 이야기식의 설교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을 중요한 사역으로 사도 바울은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강론하는데 강론이 밤 늦게까지 진행되자 3증 창가에 걸터 앉아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9절). 이 청년은 기절한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9절 하반절에 말씀합니다. 그리고 12절에 “살아난” 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유두고는 분명히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그 죽은 청년의 몸에 엎드리고 그 몸은 안았습니다 (10절). 이러한 행동은 구약에서 죽은 이를 다시 살릴 때 엘리아와 엘리사가 한행동과 유사합니다 (왕상 17:19-22; 왕하 4:34-35). 이를 통해 바울은 유두고를 살려냅니다.
이 기적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이 선교활동을 통해 행했던 마지막 기적이었습니다. 이후부터 바울은 고난을 통해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말합니다 (갈 6:17). 왜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의 삶 가운데 기적만을 베풀지 않고 몸에 고난을 통한 상처의 흔적이 남아있을 만큼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우리는 그 이유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기적을 베풀 때나 고난가운데 두실 때나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주를 위해 일하는 당신의 종들에게 “위로”를 하십니다.
그래서 유두고를 살리는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은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12절).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로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 1:6). 또한 하나님의 위로를 환경을 통해서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고후 7:5, 6).
우리가 주님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갈 때 우리 주님께서는 죽은 유두고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을 베푸심을 통해서도 나를 위로하시지만, 고난가운데서도 그 고난을 충분히 이겨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심으로도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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