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치료자)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욥기 24:1)
이제 욥은 욥기 24장에서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통해 자신의 고난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눈을 들어 다른 사람들의 고난까지 보게 됩니다.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악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고통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왜 이러한 악한자들을 심판하지 않으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1절).
욥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이해하게 된 이 세상에는 자신 외에 악에 의해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악한사람들은 땅의 경계선을(지계표) 옮김으로 공짜로 땅을 차지하고 자신의 힘으로 양떼들을 빼앗아가며 힘없는 고아와 과부의 나귀와 소들을 몰아가며 볼모로 잡히며 자신의 부를 축척합니다 (2, 3절). 아마도 돈을 빌려주며 그들의 마지막 남은 나귀와 소까지 저당 잡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땅의 경계를 옮기는 것이나 가축들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금한 것입니다 (신명기 19:14; 24:6).
또한 악한자들은 가난한자를 등쳐먹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4절). 이들로 인해 힘이 없는 자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지에 대해서 5절-8절까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들 나귀와 같이 광야로 다니면서 연명하며 (5절), 먹다 남은 음식들을 주어 먹으며 (6절), 추위에 떨며 삽니다 (7, 8절). 악한자들은 계속해서 젖먹이 고아들을 빼앗으며 (아마도 종으로 부리려고) 가난한 자들의 옷을 볼모로 잡습니다 (9절). 그러므로 이들은 아주 힘든 삶을 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10-11절). 이렇게 악한자들의 횡포로 인해 약한 자들은 고통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의를 보지도 아니하시고 (12절) 심판을 하려고 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에 (1절) 욥은 힘들어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점은 욥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힘들어 한다는 점입니다. 욥은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자신의 주변과 사회의 고통하는 약자들을 보는 눈의 지평이 넓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약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결국 욥은 “상처받은 치유자 ”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고통하는 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도움은 그러한 아픔을 격어 본 사람이 더욱더 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셨을 때에도 우리와 같은 고난과 시험을 다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고 이해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공감하며 불쌍히 여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 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나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자를 돕고 치유하라는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새로운 사명을 하나님께로 부터 받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욥과 같이 내가 받고 있는 고난을 통해 나에게만 집중하는 데서 벗어나 나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눈을 돌리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난을 통해 상처를 받았지만 이를 통해 같은 상처를 안고사는 자들을 치료하는 자로서 거듭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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