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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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성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29-30). 셰레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보자 시기가 나서 그 사실을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요한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위의 말을 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역의 목표는, 삶의 지향점은 자신이 존귀케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높이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을 힘이 없는 내가 예수님의 힘을 이용해서 내가 높아지고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에 어려움이 오면 믿음이 흔들리고 떨어집니다. 자신이 믿던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세상의 기준으로 볼때 성공해야만 그리스도가 존귀케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특히 히브리서 11장 마지막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순교하고 고난당하는 수많은 성도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12장에서 옥에 갇힌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풀려나오지만 야고보는 헤롯왕에게 잡혀 참수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예수 믿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 내가 힘있고 사랑이 많으신 예수를 의지해서 그의 힘을 빌

왜 먹어도 계속 배가고픈가?

하지현 건국의대 정신과 교수가 쓴 “술꾼, 독신녀가 '김밥, 라면 유혹 못견디는 이유” 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그는 독신녀는 몸을 생각한다면 밤에 라면이나 야식을 먹지 않아야되지만 먹게되고, 술꾼들도 술의 칼로리가 만만치 않고 더구나 카롤리가 높은 안주도 술과함께 먹게되는데 왜 오히려 공복감이 오는것일까? 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미국학자 “로저 굴드”의 설명을 예로 듭니다. 그에 따르면 기분이 좋지 않거나 외로울 때, 후회스러운 기억이 떠오를 때 배가 고프고, 반대로 누군가와 친밀한 감정을 느끼거나 믿음이 생겼을 때는 공복감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몸통 안의 위장 말고 정서와 관련한 ‘유령 위장’이 따로 있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원래 위장이 비었을 때 배고픈 신호가 와야 하는데 이 유령 위장이 가짜 신호를 보내 뇌에서 ‘배가 고프다’고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뭔가를 먹게 하는데 몸의 위장은 채워져도 유령 위장은 만족이 안 되니 포만감은 잘 들지 않고 지속적으로 허기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정서적 만족감을 얻을수 없는 상태에 처해있을때 그 정신적 허기짐을 채우기 위해 다른 무엇을 입에 넣어 허기를 채우려는 부질 없는 노력을 하는 메카니즘이 발동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정작 배고픔을 느끼는 곳은 밥통이 아니라 뇌인데 뇌에서는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고 사람은

예수님의 가족됨

(예수님의 가족됨) 1/15/2017 “말씀이 육신이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 “거한다” 는 말은 “텐트를 친다”는 말입니다. “거하다”라는 헬라어 단어”스케노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것에 대해 사용된 히브리어 “솨칸”의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이 말은 “거주하다, 살다”는 뜻입다. 출애굽기 24:16과 40:35에 보면 하나님의 성막위에 구름이 덮히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위에 충만했다고 말합니다. 성막위에 하나님의 구름과 영광으로 덮히는것 그것이 “솨칸”입니다. 즉 “거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던 “성막”(tabanacle)을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영어성경은 “tabanacled”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 거하시다는 말을 요한복음 14: 23에서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유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살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두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가정을 만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RSV나 NIV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함께 우리의 집을 만들 것이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말씀이 육신이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 요한복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인간되심을 “사람이 되셨다” 혹은 “인간이 되셨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육신이 되셨다”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합니다. “육신”이라는 말은 인간의 연약함 그리고 타락하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0:6은 인간의 연약함에대해서 말할때 “육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위해 연약한 인간의 몸을 기꺼히 입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낮아져서 인간이 되셨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힌두교인이 예수를 믿게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힌두교인이 하루는 개미둑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는 개미에 대해 연구하려고 개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가까이가 허리를 굽힐 수록 그림자가 개미를 놀라게해서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개미 군집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개미와 같이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그가 회심해서 예수를 믿게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연구하려고 사람과 같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설명해주셔서 헛된 삶을 더

늙지말고 익어가라

이제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해와 더불어 우리는 나이를 한살더 먹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대해 많은 것을 겪었고 경험했음으로 삶에 대해 좀더 넓은 안목이 생기고, 삶에 무게가 더해지며, 삶이 좀더 깊어진다는 말일 것입니다.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공자는 말년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삶을 회고 하였다고 합니다. 15세에 知于學(지우학) 즉,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고, 30세에는 而立(이립) 즉, 스스로 뜻을 확실하게 세울 수 있게 되었고, 40세에는 不惑(불혹) 즉,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 일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50세에는 知天命(지천명) 즉,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60세에는 耳順(이순)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니,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무슨일이라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70세에는 從心所欲 不踰矩(종심소욕 불유구)라고 했는데 이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즉, 70이 되니 무엇이든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성숙한 인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숙한 인격을 이루어가는 법은 세상의 방법과 다릅니다. 베드로후서 3:18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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